시각장애인과 인터넷
시각장애인과 인터넷 2009.3.4
컴퓨터와 인터넷은 시각장애인에게 거의 ‘혁명적’인 정보 접근 수단을 제공해 준다. 종래 시각장애인은 점자로 변환된 매우 제한된 분량의 정보에 의존하거나, 누군가가 읽어 주는 정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정보 ‘의존성’). 그러나, 인터넷과 음성합성기술이 접목된 지금은 시각장애인이 과거에 겪었던 정보 접근의 제약과 열악한(의존적) 지위를 거의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어떤 정보건, 문자(text)로 된 내용이 인터넷, 이메일, 전자 파일 등의 형태로 제공되기만 하면, 그 내용을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음성으로 변환하여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시각장애인에게야 말로 가장 중요한 매체이다.
우리 공공기관 웹사이트들이 장애인 정보 접근을 위하여 지금껏 해 온 ‘배려’는 대체로 다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별도의 ‘장애인 전용’ 페이지(텍스트 페이지)를 걸어 둔다; 웹사이트에 접속할 때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회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음성 파일을 자꾸 틀어 준다; 웹사이트를 둘러보는데 필요한 메뉴나 링크 제목 등, 글자(text)로 표현되어야 할 내용을 굳이 그림(image)으로 제시한 다음 (예를 들어 , ), 이 ‘그림’을 보지 못하는 이용자를 위하여 대체 텍스트를 페이지 소스에 제공한다. 예를 들어, 과 같은 방식이다. 어떤 분이 이런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 냈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지만, 세계 어디에도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하는 곳은 없다. 웹페이지 소스를 국제 표준[*]에 맞게 작성하면, ‘별도의’ 텍스트 전용 페이지는 애초부터 필요가 없다. 하나의 웹페이지를 그래픽 웹브라우저로 접속하면 그림이 포함된 페이지가 화면에 나타나고, 텍스트 기반 웹브라우저로 접속하면 텍스트로 된 내용만이 이용자의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 웹페이지와 웹브라우저 소프트웨어의 기본적 기능이다. [*]현재 인터넷 기술에 관한 국제 표준은 World Wide Web Consortium (http://www.w3.org)과 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 라는 단체(http://www.ietf.org)가 주축이 되어 형성되고 있다.
‘별도의’ 장애인 전용 페이지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걸어 둔다는 것 자체가 웹페이지 제작 기술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른바 ‘장애인 전용’ 페이지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페이지에 비하여 형편 없이 부실한 내용만이 담겨 있고, 그것마저도 업데이트가 전혀 안되고 방치되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페이지에 불과하다.
더욱 난해한 점은, 홈페이지 한켠에 이른바 ‘텍스트 전용’ 페이지로 갈 수 있는 링크가 있긴 하지만, 정작 홈페이지 그 자체가 ‘그래픽 전용’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텍스트 기반 웹브라우저로는 아예 시작(홈) 페이지부터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공공기관 사이트들이 저마다 걸어 두는 ‘텍스트 전용’ 페이지는 실은 그래픽 웹브라우저 이용자들만이 사용 가능한 텍스트 페이지인 셈이다. 시각 장애가 없는 자만이 그 페이지 링크가 어디에 있는지를 ‘눈으로 보고, 마우스를 클릭하여’ 찾아갈 수 있는 페이지인 것이다. 웹페이지 납품 업자의 시각에서 말하자면, ‘장애인 전용 페이지’는 시각장애인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은 멀쩡하고 웹 기술은 전혀 모르는 공무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페이지일 뿐이다.
웹사이트가 음성 파일을 ‘들려주는’ 것 역시 ‘展示(보여주기) 행정’의 일종이지만, 이것은 ‘장애인 전용’ 텍스트 페이지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피해’를 시각장애인에게 가하는 행위이다. 시각장애인은 어차피 웹페이지에 접속할 때, 페이지 중 텍스트로 된 내용을 즉시 음성으로 변환하여 읽어 주는 소프트웨어를 스스로 마련하여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웹사이트가 별도의 음성파일을 틀어 버리면, 페이지 내용을 이미 읽기 시작한 부분과 웹사이트가 틀어대는 음성파일의 소리가 뒤섞여 나오기 때문에 페이지 앞 부분에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웹페이지가 자동 출력하는 음성은 시각장애인의 인터넷 이용을 확실하게 방해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답시고 음성파일을 틀어대는 것은 그야말로 무식의 극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멀쩡한 한글을 굳이 그림으로 바꾸어 제시하는 우리 업계의 ‘디자인 관행’은 웹페이지를 ‘이쁘게’ 만들어 납품하고자 하는 욕구와 CSS (Cascading Style Sheet) 기술에 대한 무지가 합쳐져서 생겨난 것이다. 메뉴 항목의 위치, 글자 색상, 배경 색상, 배경 장식, 글자 크기, 폰트 종류, 폰트 장식 등은 CSS기술을 제대로 구사하면 매우 정확하고 미려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술을 알지 못하는 업체는 태그를 페이지 소스에 사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표’를 만들어 각 메뉴 항목의 위치를 고정한 다음, 글자는 아예 그림으로 바꾸어 게시하는 ‘편법’을 사용해 온 것이다. 페이지 하나를 보려면 수십 개의 그림 파일을 내려받아야 하는 이런 비효율적인 편법은 ‘초고속 인터넷 망’ 덕분에 국내에서 접속하는 경우에는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으나, 외국에서 한국의 페이지를 접속하려면 실제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휴대폰으로 이런 웹페이지에 접속할 경우에는,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메뉴와 링크의 제목(text)을 이렇게 ‘그림’으로 바꾸어 다는 편법을 사용하게 되면 그 그림을 시각장애인이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림마다 ‘대체 텍스트’를 페이지 소스에 일일이 기입해 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해 두면 텍스트 기반 웹브라우저로 접속했을 때 그림 대신 대체 텍스트가 화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맞다. 문제는 웹페이지 자체가 텍스트 기반 웹브라우저로는 아예 접속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대체 텍스트는, 텍스트 기반 웹브라우저로 접속했을 때 불편 없이 그 웹사이트의 내용을 둘러볼 수 있게(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인데, 텍스트 기반 웹브라우저로는 접속 조차 불가능한 페이지를 만들어 놓고, 그 페이지 안에 대체 텍스트를 일일이 써넣고 있는 우리 업계의 현실은 엽기성 코메디 수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웹페이지를 어떻게 작성해야 일반인은 물론, 시각장애인도 아무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는 전세계의 전문가들이 자세한 기술 표준을 이미 마련해 두고 있다. Web Content Accessibility Guideline (WCAG)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 또한 웹접근성 향상을 위한 상세한 지침을 마련해 두고 있다. 이러한 지침들을 차근차근 공부할 시간이 없는 바쁜 개발자들이나, 그런 전문 기술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웹사이트 발주자나 공무원들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몇가지 원칙만 지키더라도 시각장애인의 인터넷 이용에는 획기적인 개선이 있게 될 것이다.
첫째, 시각장애인 전용 페이지를 만들지 말 것. 텍스트 전용 페이지도 만들지 말 것. 둘째, 웹사이트 자체를 텍스트 기반 웹브라우저로 접속했을 때 불편이 없도록 할 것(웹사이트가 텍스트 기반 웹브라우저에서 정상작동 하는지는 http://www.seo-browser.com/ 에서 확인 가능). 셋째, 메뉴나 링크 제목을 ‘그림’으로 만들지 말 것. ‘글자’로 된 내용은 ‘글자’로 제시할 것. 넷째, 음성안내 파일을 제발 좀 틀어대지 말 것. “시각장애인 전용” 페이지? 그야말로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다.
출처 : 오픈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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