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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관련 용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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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특수교육
작성일 2008-07-18 (금) 09:51
ㆍ추천: 0  ㆍ조회: 3860   
장애인 관련 용어에 대한 고찰
장애인 관련 용어에 대한 고찰
 
김효진 한국DPI 기획실장, 계간 보이스 편집장
 
내가 경험한 용어들   
 
- 환자(아픈 사람) : 어릴 때 우리 식구들은 나를 가리켜 ‘다리 아픈 아이’라고 했다. 우리사회가 그렇듯이 가족들은 나를 ‘아픈 사람’으로 규정하고, 내 상태가 언젠가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장애인을 환자 또는 아픈 사람으로 규정하게 되면 장애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즉 장애인 자신이 문제이므로 치료와 재활을 통해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장애인을 배제하는 사회환경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장애인들은 장애로 인한 신체적 고통보다는 장애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회적 인식,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차별 때문에 고통받는다. 따라서 바뀌어야 할 것은 장애인이 아니고 장애를 이유로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환경이다.
 
- 절름발이 : 어릴 적 동네 아이들이 절름발이라며 놀렸다. 가족이나 친지들도 놀리는 뜻은 아니었지만 가끔 ‘다리 저는 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어쨌든 장애로 인한 외형상의 특징을 두고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장애 외에도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한 사람의 정체성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로 인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면서 파행적(跛行的)이라는 말을 많이 보았는데, 그것이 ‘절뚝거리며 걷는 식으로 균형이 잘 잡히지 않은 상태’라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당시 사회과학 서적 대부분이 일본서적(서양서적일지라도 일본서적을 중역한 것)이었는데 아마도 일본에서는 그런 말을 많이 쓰는 모양이었다.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언어습관마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안타까웠다. 언론에서도 ‘파행적’ 혹은 ‘절름발이식 행정’이라는 표현이 간혹 눈에 띠는데, 불균형하다든가 균형 잡히지 않았다는 식으로 얼마든지 다른 표현이 가능하다. 그밖에도 벙어리 냉가슴, 꿀먹은 벙어리, 눈뜬 장님, 장님 코끼리 만지기, 안팎 곱사등이 등의 비유적인 표현이 많은데, 이는 장애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가령 벙어리 냉가슴은 가슴앓이, 안팎 곱사등이는 진퇴양난, 사면초가 등의 고사성어나 꼼짝 못하다 등의 표현으로 바꾸어도 얼마든지 뜻이 통한다.
 
- 병신 : 신체나 정신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기능을 잃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을 두고 욕을 할 때 ‘이 덜 떨어진 장애인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장애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 말을 내 앞에서 직접 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병신이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욕설로 흔히 쓰이기 때문에 비록 나를 향한 말이 아니어도 듣기가 늘 거북했다. 아마도 병신이란 말은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가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되는 그날까지 계속 욕으로 사용될 것이다.
 
- 불구 : ‘불구(자)’ 또는 ‘불구폐질(자)’ 라는 칭호는 ‘온전하지 못한 자’의 뜻으로 주로 지체장애인을 지칭하며 1980년대 이전까지 폭넓게 사용되어 왔다. 1980년대 초「심신장애자복지법」제정, ‘88장애자올림픽’의 개최, 1989년「장애인복지법」제정, 80년대 후반 장애인 인권운동의 확산 등으로 ‘불구자’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장애자’라는 용어를 법정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신문기사에서 외신을 번역하거나 책자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간혹 사용되기도 한다.
내 경우 취업을 앞두고 사원모집 광고나 공무원 시험 공고문에서 불구 또는 불구폐질자는 제외한다는 문구를 접하곤 했었다. 교육을 마치고 사회진출을 앞둔 상태에서 엄청난 장벽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과연 내가 무엇을 갖추지 못했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 장애자 : 1990년에 개정된「장애인복지법」에서는 장애인복지법(89. 12. 30) 제1장 총칙 제2조와 동법 시행령(90. 12. 1) 부칙 제2조에 의거 ‘장애인’을 법적 용어로 만들었다. 울림터, 전지대연 등 장애인당사자단체에서 ‘장애자’의 ‘자(者)’는 인격을 비하하는 ‘놈 자(者)’이고, 또한 일본식 표기이므로 권리를 가진 사람에 초점을 맞춰 ‘인(人)’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반영되기에 이른 것이다. 
 
- 정상인 : 법정용어와는 관련이 없지만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비정상인’으로 지칭해왔다. 어쨌든 ‘정상’이라는 기준을 만들어놓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비정상’으로 몰아붙이는 이분법에 길들여져 있던 탓이다. 사회는 끊임없이 마이노리티를 생산, 재생산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를 유지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선하고 다른 편은 나쁘다, 우리는 우월하고 다른 편은 열등하다는 서열을 매기면서, 다른 편을 악=열등함으로 자리매김하고 우리와 다르게 만드는 그 특성, 그 자질을 가능한 억압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정상적(?)인 사회유지를 위해 필요한 메커니즘의 하나인 것이다.
‘정상인-비정상인’의 이분법은 사회 규범적인 차별로 장애인은 사회와 국가의 유지에 불필요하거나 부담을 주는 비정상인으로 일반화 될 수 있다. 장애인은 정상인과 반대되는 비정상인이 아니며, 장애인의 대칭적 개념은 비장애인으로 쓰면 될 것이다. 장애를 기준으로 한 장애인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인 셈인데, 이는 힘있는 다수의 의도적인 편가르기나 분리와는 달리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정체화하기 위한 저항의 한 수단일 수 있다고 본다. 
 
용어는 왜 중요한가 
 
인간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스스로 규정을 내리며 정체성을 형성한다. 정체성은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것과 관련된 ‘개인적 정체성’과 특정 사회운동의 주체라든가 어떤 민족의 구성원과 같은 ‘집단적 정체성’의 두 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인종, 피부색, 종교, 이념, 장애 외에 취향, 소비, 라이프 스타일 등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모든 사회운동은 개인들이 스스로 운동의 주체로서 정체성을 가질 때 가능하다. 장애인운동 역시 장애인이 자기 심문(self-interrogation)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구성함으로써 발전의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한 개인이 집단적 정체성을 가지는 데 있어서 어떤 용어로 불려지는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이 사는 사회 속에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차이에 대한 잘못된 반응들은 차이를 인식하고 그러한 차이를 잘못 명명하는 데서 기인하는 오류 때문에 비롯된다. 가령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는 용어로 불려지기 이전에는 병신, 불구자 등으로 불려졌다. 이들 용어는 장애인을 병이 있는 사람, 어딘가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비장애인들의 용어이지 장애인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비장애인들은 장애라는 차이를 잘못 인식하고 잘못 명명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장애인을 배제하고 차별해왔던 것이다. 장애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장애인을 정의하는 용어를 두고 정부와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요구함으로써 현재 통용되는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  
 
이렇듯 장애인운동은 장애인 자신들이 환자이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모든 운동은 억압받고 있는 당사자들의 저항과 문제 해결을 위한 피나는 투쟁에 의해 발전해왔다. 자기대표(self representation)의 문제는 여성문제, 노동문제, 소수집단 문제를 다룰 때에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장애인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 집단으로 취급되면서 전문가와 서비스 제공자의 통제가 당연시 여겨지고, 전문가의 조언이 마치 장애인의 견해를 적절히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장애인을 환자로 여겨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삶의 주요한 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이 소수집단으로서의 집단적 정체감을 형성하고 문제 해결의 주인으로 나서는 데 있어 스스로가 희망하는 용어로 불리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이 만들어온 장애인에 대한 허상과 오해로 인해 참된 정체성을 방해당해왔고, 이로 인해 제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이 장애 문제 해결의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 장애인들은 더 이상 우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기준과 그들이 만들어놓은 편견에 의해 잘못 규정당한 채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희망하는 용어로 불린다는 것은 장애 문제를 올바로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문제이다.
세간에는 용어 따위를 갖고 시시비비를 하는 행위를 두고 비뚤어진 집단의식이거나 사소한 문제에 연연하는 태도로 매도하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분명 장애인의 역사, 장애인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부정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용어의 정립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며 장애 문제 해결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한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더구나 그 집단이 사회적 약자일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념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사회변화를 바라지 않는 지배질서의 주도자들은 의도적으로 소수자 집단을 폄하하는 용어를 씀으로서 차별과 편견의 강화를 통해 지배질서를 강화할 것이고, 사회변화를 통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들을 향한 부정적 인식을 걷어내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건강한 에너지를 확인하면서 자신들을 집단적으로 정체화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변화를 바라되 기존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완만한 해결을 원하는 쪽에서는 지배자들에게 동정과 시혜를 구하면서 소수집단을 어여삐 여겨달라고 호소하는 방식으로 문제해결을 하려 하며 그 과정에서 용어도 달라질 수 있다.    
 
장애우라는 용어의 부적절함
 
요즘 ‘장애우’란 용어가 급속히 퍼지고 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라는 단체에서 ‘장애우’라는 용어를 주창하면서 자신의 단체명에 사용함은 물론 방송과 언론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이 용어를 적극 권장한 것이다. 연구소(정확하게는 연구소에서 발행하고 있는 함께걸음)에서 밝힌 입장(함께걸음 2003년 2월호, 4월호, 이하 ‘입장’)에 의하면 1987년 연구소 설립 당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사회적 지위가 무지와 잘못된 편견으로 ‘동정과 일방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지에서” ‘장애우’라는 용어를 주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아직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채택되지 않았던 때로서 장애우라는 용어를 통해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어보겠다는 선한 의지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의지가 선량하면 방법의 옳고 그름, 결과 여부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장애인이라는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의 선택은 제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의 이름을 정하거나 동네 친목모임의 이름을 정하는 행위처럼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인 행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장애우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두 가지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짚어보기로 하겠다. 
첫째, 장애우라는 용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사회가 장애인에게 가하는 차별과 배제를 은폐시키고 장애인을 여전히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용어라는 점이다.

“장애우는 장애인의 또 다른 표현으로, 고통받는 장애인들의 벗으로 자리하기 위해 함께걸음이 만든 말”이라고 월간 함께걸음에서 매번 밝히고 있듯이 장애인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임을 강조하기 보다 장애인의 고통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될 것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소(함께걸음) 측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생기기 전 ‘장애자’에 다분히 비하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으므로,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 모두 친구처럼 동등한 관계로 함께 평등한 사회를 일궈내자는 바람을 담아 사용하고 있다지만, ‘장애우’란 말에는 이미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친구로 보아주자’는 의도엔 장애인이 특별한 존재이고, 불쌍하고 동정해야 할 대상이므로 의도적으로 좋게 보아주자는 강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친구처럼 대하자는 취지에는 분명 애써 피하거나 멀리하지 말고 스스럼 없이 가까이 다가가자거나 장애인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때 장애인은 결코 동등한 존재가 아니며 고통받고 있는 존재로서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일 뿐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도에는 장애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비장애인의 참여를 촉구하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걸음에서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차별과 불평등에 반대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장애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차별과 불평등에 반대한다는 취지는 연구소와 함께걸음이 나름대로 방향성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구체화된 개념으로 여겨지므로 환영할 만하다. 또 함께걸음에서는 장애우의 우(友)가‘모두가 동등한 인간’이라는‘평등’의 철학을 담고 있는 용어로서 함께걸음과 연구소가 갖고 있는 활동의 이념과 실천의 지향점이기도 하다고 설명하였다. 즉‘장애우’의 우(友)는 친구관계에서는 누구나 다 주체이므로 주체와 대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서 평등한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보기에 대단히 앞선 논리인 것처럼 여겨지기 쉬우나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낭만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안고 있다.
평등에 대한 지향은 모든 장애인의 지향점이기도 하지만,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대상으로 존재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대상화되어 있는 장애인들의 현실에 눈감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평등의 철학을 지향한다면 장애인도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장애인’이 엄연히 법정용어로 채택되어 있는데, 굳이 오해의 소지가 많은 친구라는 뜻을 담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연구소가 출범했을 당시 ‘장애우’라는 용어가 필요했던 절실한 이유에 대해 백 번 이해가 가면서도 1990년 ‘장애인’이라는 공식용어가 채택된 이후에도 여전히 ‘장애우’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묻고 싶다.   

또 ‘장애우’의 우(友)가 단순한 친구를 의미하지도, 비장애인장애인이 친구를 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며 그야말로 평등한 관계를 의미한다는 주장 역시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 외에도 수많은 불평등과 억압이 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체제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백인과 흑인 등등 수많은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불평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어떤 집단이나 계층에서도 모두가 주체이므로 주체와 대상(억압하는 쪽과 억압받는 쪽, 또는 누리는 쪽과 소외되는 쪽...)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면서 친구라는 뜻을 담은 용어를 만들어 그 억압을 깨겠다는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았다.

만일 엄연히 존재하는 억압과 소외를 애써 부정하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인데 뭘 그러느냐’는 태도를 보이는 쪽이 있다면 그는 현 사회질서에서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지배질서의 유지자들일 것이다. 소외와 억압을 느끼기에 현 질서를 바꾸지 않으면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소수집단 쪽에서는 왜 현재의 불평등한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으며, 어떻게 하면 그토록 견고한 질서에 균열을 만들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객체와 대상을 굳이 구분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낭만적이긴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현재의 차별구조를 강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굳이 오래 전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아도 노동자들의 사회변혁 에너지를 잠재우기 위해 노동절을 인정하지 않고 굳이 근로자라는 용어를 법정용어로 채택한 배경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었는지 꼼꼼이 되집어보면 우리의 문제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회사들이 저마다 내걸었던 캐치프레이를 기억해 보라. ‘근로자를 가족처럼!’ 소름끼치지 않는가?

앞으로 차별과 불평등에 반대한다는 방향을 계속 견지한다면 ‘장애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문화운동’(?)으로 그것이 실현가능하다는 낭만적 발상에 대해 재고해보기를 바란다. 세상은 혼돈스러워 보여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견고한 질서를 갖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교묘하고도 집요한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문화운동이 혹시 장애인의 차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깨뜨려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장애인을 여전히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지 않나 반성해 볼 일이다.

둘째, 장애우는 장애인이 스스로를 정체화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즉 ‘장애우에게 사랑을!’ ‘장애우돕기’라는 말은 성립될 수 있지만, ‘저 장애우입니다’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장애우로 지칭할 수 없다는 것은, ‘장애우’란 용어가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착한 비장애인의 용어이지 장애인 자신이 불려지기를 희망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이 만들어온 장애인에 대한 허상과 오해로 인해 참된 정체성을 방해당해왔고, 이로 인해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다가 더 이상 자신을 대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 가운데서 스스로가 희망하는 용어로 불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요구인 것이다. 함께걸음 입장에서는 장애우에 대한 장애인들의 거부반응을 두고 단지 낯설음과 어색함 때문으로 치부하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동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고 문화운동으로 이해해줄 수는 없느냐며 용어에 대해 문제삼는 장애인당사자들이 편협한 태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장애인당사자들은 장애인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운동을 그것도 아주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철학과 취지와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해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는 것이 성숙한 시민사회를 이루려는 운동단체의 자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작 그 운동의 주체여야 할 장애인당사자들이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맥락에 잘 귀기울일 일이다.
 
당사자주의 관점에서 사고하라

80년대 후반 무렵 연구소가 이 용어를 만들어낸 동기와 과정, 의미에 대해서 아무리 이해를 해도 연구소와 함께걸음이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을 대표하는 공식용어로 자리매김 하기를 원하지도, 주장한 바도 없”는데 “방송이나 신문 등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장애인’을 대체하는 용어로 인식되어지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무책임하다. 연구소는 그동안 왕성한 활동력을 발휘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행위는 이미 의도적인 행위가 아닌가?―시민사회단체와 언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으며, 그 가운데에서 장애우라는 용어가 급속도로 퍼지게 되고 심지어 공식매체인 방송과 신문에서까지 장애우라는 용어를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상황을 두고 자신들과는 무관한 현상이라고 주장하려 하는가? 더구나 월간 ‘함께걸음’에서는 장애인이라는 모든 단어를 서슴없이 ‘장애우’로 바꾸어 쓰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라는 단체 이름이 ‘중증장애우독립생활연대’로 둔갑하는가 하면 ‘당사자주의와 장애인’이라는 글의 제목을 ‘당사자주의와 장애우’로 바꾸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이들에게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을까? 장애인운동을 하면서도 장애인집단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는 장애인당사자들이 장애우로 불리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과 비판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 용어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비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보다는 자기변호에만 급급한 연구소(함께걸음)의 태도에 크게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있어서 주체이기에 누구보다도 문제를 잘 알며, 그러한 문제제기에 있어 다소 서툴기는 해도 엄연히 장애인당사자주의라는 세계사적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역사적 맥락이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도 마치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거나 용어 자체에 대한 비판이기보다 자신들의 조직 활동에 비판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장애인을 또다시 무시하는 태도이다. 함께걸음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자신들의 조직이 ‘장애우’라는 용어를 쓰게 된 배경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라고 훈계하면서 정작 8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장애인당사자들이 자신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주체로 나서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정당한 용어로 불려지고자 노력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몰역사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걸음은 더 이상 장애인들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당사자주의 관점에 서서 문제해결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당사자주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냐 아니냐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장애 문제 해결의 주체가 장애인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현재 전문가 중심, 공급자 중심의 패러다임을 당사자 중심, 수요자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바꾸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알 것이다.

제발 장애인과 그들의 문제에 관해서―용어까지도― 논의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장애인 자신을 배제하지 말고 우리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 Nothing about us, without us!!
 

   출처 : http://www.dpikorea.org/

     
이름아이콘 angel
2011-04-17 21:03
장애인 관련 용어가 왜 중요한지 바른 설명을 읽고 이해하게 되었다.
장애우라는 용어는 색다르면서도 뭔가 약간의 책임감같은 것을 느끼곤했었는데
의미를  확실히 알고서야 왜 그런지 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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