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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문화 - 동화인가, 통합인가?
column,criticism
칼럼, 만평
작성자 특수교육
작성일 2009년 2월 11일 수요일
ㆍ추천: 0  ㆍ조회: 6312      
장애 문화 - 동화인가, 통합인가?
콜린 반즈, 제프 머서 / 윤삼호 (대구DPI정책부장) 옮김
 
* 이 글은 p.515~534에 실린 콜린반즈와 제프 머서의 논문을 요약 번역한 것입니다.
 
1970년대 이래, 장애인 운동은 전 세계에서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 운동은 장애란 의료 조치가 필요한 개인의 손상과 관련되어 정의되어야 한다는 정통적 시각과 맞섰다. 장애이론과 실천이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장애인 운동은 이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기본적 시민권 거부를 뒷받침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장벽을 제거하지 못해서 생겨난다 - 이른바, 사회적 장애모형 - 고 주장한다. 이 운동은 미디어와 문화적 표현에 들어있는 부정적 편견에 대항한 공동 투쟁을 통해 수행되었다. 또한, 장애인의 정치화는 긍정적 장애인 정체성과 의식을 찬양하는 대안적 장애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문화 분석하기

 문화사회학은 노동 양식, 여가 활동, 물질 상품은 물론이고 신념, 의례, 관습, 가치 같은 인간 사회의 상징적 측면들을 포함하는 폭넓은 해석을 수용하였다. “문화는 해당 집단 구성원들이 가진 가치, 이들이 따르는 규범, 그리고 이들이 창조해 내는 물질 상품으로 구성된다.” 가치는 “추상적 원리”이지만, 규범은 무엇이 사회 생활에 수용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규칙이나 가이드라인을 아우른다. 이것은 문화를 공유된 “생활 방식”으로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천, 의미, 그리고 가치는 “소통적, 재상산적, 경험적, 탐구적”이다는 것을 통해, 문화는 “의미 체계”임을 강조된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사람들은 문화적 가정과 규칙 - 가령, 무엇이 “정상적”이고 전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가, 그리고 무엇이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가 - 을 배우거나 그 속으로 사회화되어야 한다. 1904년에 출간된 쓴 웰즈의 단편 소설에 누네즈라는 사내가 등장하는데, 그는 산 속에서 길을 잃고 선천적 맹인들만 모여 사는 외딴 마을로 들어간다. 그는 “맹인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이다”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누네즈가 맹인들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적 규범과 가치를 가지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다.

 복잡한 산업사회라는 조건에서, 문화는 그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완전한 통일성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더욱이 문화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전형적으로 어느 정도 유동성을 보인다. 문화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그 사회 구성들이 배우는 기존의 의미와 지침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시되고 검증되어야 하는 새로운 정보와 의미이다. 이 두 측면은 인간 사회와 인간 사고의 일상적 과정이며, 우리는 하나의 문화가 가진 속성을 통해 이 두 측면을 바라본다. 문화란 언제나 전통적인 동시에 창조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문화와 사회의 정확한 관계 형태, 특히 그 관계의 물질적 기초는 맑스, 베버, 뒤르켐 같은 고전 사회학 이론가들의 문헌에서부터 상당한 이론적 논쟁을 야기해 왔다. “정통” 맑스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통제가 해석의 열쇠를 제공한다. 이렇게 되면, 사고를 비롯한 이른바 상부구조의 측면들이 물질적 기초의 조건들을 반영한다는 조잡한 결정론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설명은 불평등을 정당화하거나 도외시하고 특정 집단에 대한 억압을 영구화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인 문화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최근의 분석은 다양한 범주의 사회이론, 특히 비판이론, 신-맑스주의, 페미니즘, 탈구조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비판이론이 성행하던 1930년대 미디어와 문화 연구를 처음 시작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학파의 초점은 다학제간 연구였으며, 또한 미디어 정치정제학, 텍스트 분석, 그리고 미디어가 청중들에게 미치는 사회적ㆍ이데올로기적 영향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노동계급의 수동성을 조장하고 산업자본주의를 안정화시키는 대중 문화의 역할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지만, 일부 “고급” 문화가 사회적ㆍ정치적 비판론을 자극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방식을 탐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이슈는 이탈리아 맑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붙기 사작한 1960년대에 들어 비로소 채택되고 재구성되었다. 자본주의적 지배 방식에 대한 그람치의 연구는 강제의 의미뿐만 아니라 지배 집단이 문화적 행위의 생산과 소비를 관리함으로써 - “자발적 동의”에 의한 - “헤게모니”를 획득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람치의 영향은 영국 버밍엄대학교 현대문화연구센터(CCCS)의 스튜어트 홀과 그의 동료들의 문화 연구 접근법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들보다 더 중요한 기여자는 레이먼드 윌리엄즈인데, 그는 문화 자본주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문화학 연구에 불을 당긴 이들의 연구는, 포괄적 문화 개념을 폐기하고, 그 대신 지배 문화나 “헤게모니를 가진” 문화와 경제ㆍ사회ㆍ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상대적 자율”을 탐구한다.

 최근에, 문화적 차이와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20세기 후반 사회 분석은 문화학 내부에서 싹트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계급 갈등과 투쟁을 강조하다가 이제는 장애뿐만 아니라 인종, 성별, 연령을 비롯한 사회적ㆍ문화적 차이에 관한 훨씬 더 폭넓은 담론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문화 정치의 변화 - 스튜어트 홀이 흑인 문화를 연구하면서 “표현의 관계를 둘러싼 투쟁에서 표현 그 자체의 정치로” 이동하였다고 언급한 것 - 를 예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애인의 주변화와 종속화에 대항한 지속적인 투쟁에서 정치성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가정된 “장애 공동체” 안에서 한 “장애인”이 된다는 의미를 둘러싼 해석이 도전받고 있다는 말이다. 정치 투쟁은 문화적 표현 분야에서 나타난 새로운 형식을 취한다.

 영국에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 정통성에 도전한 최초의 책들 가운데 하나는 폴 헌트가 편집한 <낙인: 장애 경험>이였는데, 이 책은 시대의 변화를 나타내는 한 징표였다. 이 책에 수록된 헌트의 글을 읽어보면, 장애인은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사회적 가치에 직접 “도전”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일상적인 것에서조차 분리되어 있다.” 장애인들은 “불행하고, 쓸모없고, 남과 다르고, 기죽어 있고, 아프다.” 이것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를 “개인적 비극”으로 특징지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과 가치를 반영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억압적인 표현들을 대체하기 위한 장애인 투쟁을 위한 장을 마련해 준다. 그것은 긍정적인 장애인 정체성을 표현하고 지탱하는 장애 문화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장애 문화는 장애인을 정치화시키고 단결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반대로, 최근에는 후기구조주의 및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영향으로 “차이”와 복합적 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장애 하위문화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자, 장애인들의 정치적 행동의 통일 가능성에 관한 논쟁을 촉발한다.
 

장애에 대한 문화적 표현들

 역사적으로 볼 때, 주류 문화는 장애인의 현저한 “비정상성”을 강조함으로써 장애인들에게 특성을 부여해 왔다. 이런 것들은 “오락물”의 원천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거나 공포와 혐오를 비장애인들에게 심어주거나 각인시킨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상류층 가정은 집집마다 만찬이나 잔치 자리에서 여흥을 돋우기 위해 창피하고 고통스러운 굴욕을 감내하는 것이 자신의 주 임무였을 것으로 보이는 난장이, 벙어리, 백치, 꼽추 몇 명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중세 사회도 줄곧 비정상성에 매료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유럽의 여러 궁중에는 키 작은 사람들로 구성된 “궁중 어릿광대”나, 여흥을 돋우기 위해 “백치” 흉내를 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선천적 학습장애인 같은 “바보”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장날, 축제일, 공휴일에는 인지된 “기형”이나 지적 손상을 가진 사람들이 전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농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신생아를 구경시켜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들램 같은 “정신병원” 환자들도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시되었다.

 19세기에는 이 같은 전시가 “프릭쇼”로 발전했는데, 이 쇼는 “이른바 신체적, 정신적, 혹은 행동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서커스, 전시회 같은 여흥장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된 전시”였다. 프릭쇼는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성행했다. 프릭쇼는 미국의 이른바 “어글리법”으로 이어졌는데, 이 법은 “정상적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거나 놀라게 하는 외형을 가진 자들을 사회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몇몇 프릭쇼 출연자들이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그에 상으하는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프릭쇼가 손상을 가진 자들을 착취하고 모욕하는 장소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20세기 초반 프릭쇼의 인기가 눈에 띄게 시들해졌지만, 프릭쇼를 대신하는 다른 문화 양식들이 생겨났다.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부정적 편견을 반영하고 각인시켰으며, 장애인을 “결함있는” 존재 혹은 “리미널(liminal)” 상태로 다루는 것을 널리 합리화시켰다. “〔장애인은〕물고기도 아니고 새도 아니다. 이들은 정의되지 않고 모호한 인간으로서 사회로부터 부당하게 고립된 채 존재한다.” 실제로, 20세기 말에 수전 손탁이 생생하게 묘사하듯이, 암이나 HIV/AIDS 같은 “공포스러운 질병”과 관련된 문화적 의미는 너무 강력해서 “잘 포장된 소름기치는 은유에 의한 선입견 없는 환자의 왕궁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질병과 손상이 낙인과 공포의 촉매제가 될 때가 더러 있지만, 질병과 손상이 “고급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역반응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19세기에는 결핵 혹은 “폐결핵”이 개인의 창조성과 예술적 영감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캐서린 맨스필드, 존 키츠 등 유명한 소설가와 시인들 상당수가 그 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어떤 질병 혹은 손상은 예술가의 호소력이나 통찰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 같은 연관은 레이 찰스, 스티비 윈더, 핸크 윌리엄즈 같은 현대 음악가들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규범”으로써 지배력을 가진 것은 손상을 가진 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문화적 편견이다.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표현에 관한 일련의 미국 연구는 미디어 문화라는 다른 형식에서 이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비평한다. 예를 들면, 로렌스 크리겔은 이 책에 기고한 글에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모비딕>을 검토한 뒤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병신과 장애인의 세계는 낯설고 컴컴하다. 그리고 이들의 세계는 그 세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바로선다. 병신들은 자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 이들은 자기 경험의 경계 밖에서 결정된 정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주장은 농 이미지 혹은 “병리학적 신화”를 조사한 존 슈크먼에게 영향을 주었다. 다른 연구자들은 이 같은 장애를 유발하는 이미지가 인기있는 만화 시리즈로 어떻게 확산되는지를 논증한다.

 영국 미디어 프로그램 콘텐츠 분석 역시 비슷한 상황을 묘사한다. 예를 들자면, 가이 컴버배치와 랄프 네그린은 1988년에 6주 동안 TV 방송물을 모니터했다. 이들이 발견한 핵심은 TV 프로그램들이 여전히 “개인적 비극” 접근법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었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의 다른 연구에 의해 보강되었다. 가장 흔한 줄거리는 장애인을 “특별한 성취”와 아울러 의료적 조치이나 돌봄에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더욱이 장애인을 일상적인 사회 구성원이나 “인생 드라마”의 일부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동정, 공포, 혹은 찬양의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으로 활용함으로써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표현은 편견이 심했다. 신문의 장애 관련 기사 역시 같은 비판을 받았다. 신문 지면은 건강, 모금, 자선, 그리고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관심사가 대부분인 제한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이런 양상은 타블로이드판 신문이나 브로드쉬트판 신문이 대동소이하지만, 타블로이드판이 특히 장애를 드라마틱하고 센세이셔널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처럼 장애에만 초점을 맞춘 초기 시도는 장애인에 대한 표현은 젠더, 민족, 계급, 연령 같은 다른 사회적 요소들에 의해 조정된다는 더 복잡한 분석에 자리를 내주었다. 가장 세심한 연구는 문학 텍스트 안에서 장애의 “젠더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남성성 정의와 장애 정의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한 연구들도 있다. 이를테면, <7월4일생>, <워터댄스> 같은 영화는 갑작스런 손상에 대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개인들을 묘사한다. 남자다운 힘과 장애인의 무력함을 극적으로 대립시킨 것은,〔남자가〕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이 상처가 된다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훨씬 더 큰 상처가 될 것이라는 가정을 강조한다. 반대로, 여자는 상처받기 쉽고 소극적이고 의존적인 것으로 전형적으로 표현된다. 이는 장애인 묘사에서 작가는 여자의 비극적인 역할 혹은 “비장애인” 남자가 “구해” 줄지도 모르는 성스러운 인물에 괌심의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호주의 헬런 미코샤와 리네 다우즈는 장애 여성을 성적인 존재로 혹은 아내와 엄마라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로 묘사하는 데 대한 거부감을 연구했다. 이들은 “정상적” 역할을 하는 장애인 이미지에 대한 장애인 운동의 일반적 지지와 성별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요구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특정 예술 작품, 텍스트, 공연물, 상영물 따위에 맞서 싸우는 문화학의 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레너드 데이비스는 “정상성”의 사회적 구성과 함께 “장애 관련 어휘”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다. “정상성 헤게모니의 함의는 심오하며, 문화 생산의 한 가운데로 확산된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소설에서 ... 몸의 영역에 대한 조사, 즉 신체적, 정신적, 민족적 차이를 주목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라고 주장한다. 미국 문화에 나타난 장애 표현을 연구한 또 다른 중요한 연구자는 로제마리 가런드 톰슨이다. 그녀는 전통적인 프릭쇼, <톰 아저시의 오두막> 같은 낭만적 소설, 그리고 현대 미국 흑인들의 소설 등에서 자료를 모았다. 아울러 톰슨은 현대 문학 이론, 페미니스트 이론, 사회 이론 등 다양한 이론적 전통, 특히 이 같은 이론들의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에 많이 의존하여 “육체적 이상”이 어떻게 하여 “능력 있는 신체성”에 대한 “문화 지배의 산물”이 되는지를 연구한다.

 데이빗 헤비는 자선 광고인 을 연구했는데, 이 연구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폭넓은 관심사를 통해 신체 표현을 심미적ㆍ이론적으로 분석한 시도들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헤비는 영국의 자선단체들이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할 할 때 생산품에 “상표를 붙이는 것”과 똑같이 특별한 손상을 “시장에 내놓는” 방식을 연구한다. 초창기 자선 접근법의 특징은 손상을 가진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인데, 주로 흑백 대비를 통해 이들의 신체적 “결함”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와 연민을 자아내기 위함이다.

 장애인의 삶에서 자선 이미지의 역할은 여성 억압에서 포르노그라피의 역할과 연결된다. 두 경우 모두, 몸 특히 몸의 특정 부위에 초점을 맞춘다. 더욱이 그 이미지가 생산되고 해석되는 조건들은 그 주체의 통제권 밖에 있으며 광범위한 의미 관계와 힘 관계를 포함한다. 자선 이미지의 목적은 그 주체를 욕망이나 공포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보는 사람의 감성적 반응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많은 장애인들에게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장애 이미지를 통해 기부금을 모으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자선단체들도 일부 있다. 이 같은 접근법은 “장애가 아니라 능력을 보라”는 식이다. 최근 영국에서는 SCOPE(경련성마비인협회) 캠페인은 장애를 구성하는 편견과 차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고 이 단체가 개인적 비극 접근법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채셔 재단은 ‘enabled’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 전국적 광고 캠페인을 전개함으로써, 거주시설 서비스에서 다른 지원 서비스로 강조점을 옮겨 SCOPE를 따라하고 있다. 학습장애인을 위한 재단인 멘캡 역시 새롭고 더 “급진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멘캡의 “꼬마 스티븐” 로고는 시민권과 사회적 권리를 포함하는 보다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멘갭의 광고 이미지는 아직도 “매력적인 사진으로 마케팅하려는 욕망”에 지배되고 있다.

 20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내내, 일반적으로 보면 장애인에 대한 “긍정적인” 문화 이미지와 미디어 이미지가 뚜렷하게 향상되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내내 장애인 모델들이 리바이 청바지, 맥도날드, 코닥 필름 광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의 연속극과 드라마에는 “장애인” 등장인물과 장애 관련 이야기가 더 많아지고 있다. 영국 TV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1994년에 Skallagrigg - 시설수용 장애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영웅 - 의 등장으로 가시화되었다. 이 같은 사례들은 미디어가 영화 제작자 예술가가 장애 경험과 만난 것을 어떻게 “정당하고 의식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장애 경험을 통해 어떻게 진보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론적 수준에서 볼 때, 영국 작가들은 장애를 유발하는 이미지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비교하여 미국 문헌에서는 상대적으로 장애 표현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학적 접근법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대조적인 강조점이 여전히 존재한다. 전자는 손상을 몸의 특성으로, 그리고 장애를 사회적 관계로 구분하는 사회모형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았다. 게다가 영국 문학은 사회적 배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제공하는 미디어 표현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만, 미국 문헌은 언어적, 축자적 분석, 그리고 신체적 다양성, 불평등한 지위와 파워, 문화적 의미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미디어의 영향력


 20세기 내내 사고와 정보를 소통하는 메커니즘으로서 미디어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문화 정치이 한 영역으로서 미디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문화적 이미지와 미디어 이미지가 수용자들에게 직접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폭넓은 가정이, 미국과 영국의 장애 관련 문헌에서 똑같이 존재한다. 이는 하나의 경험적 질문으로 남게 되지만, 이 질문은 사회적, 문화적 동질성보다는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최근 20세기 후반 사회와 문화에 부여한 특징과 불편하게 마주앉아 있다. 이것은 장애를 유발하는 메시지를 비롯한 특정 시각을 퍼뜨리는 미디어의 영향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낸다.

 지금까지는 장애의 문화적 형식의 범위를 통해 “자연스러움”이 촉진되고 강화된다는 간단한 “피하 주사기” 모형이 성행했다. 이와 반대로, “이용과 만족” 접근법은 사람들은 단순히 스스로 행동할 수 없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이익에 맞게 문화 자료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연구자들은 그람치의 헤게모니 개념을 활용하여, 수용자들이 미디어가 의도한 메시지와 협상하거나 이를 거부하기 위해 반대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미디어가 고지함에도 불구하고 미디어가 어떻게 지배적 질서에 대한 “동의를 제조하는지”를 탐구하였다.

 적극적인 미디어 수용자의 가능성은 아직도 미디어 장애라는 맥락에서 충분하게 검토되지 않고 있다. 확실한 건, 미디어 수용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 사회화되어 있으며, 특정 주제에 관한 확고한 시각을 발전시켰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문화적 편견과 미디어의 편견은 일반 대중들의 장애 편견을 강화하고 확대시킨다는 가정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사실은 정보, 이미지, 의견을 전파하는데 미디어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정신병과 HIV/AIDS 연구에서 분명해졌다. 하지만 일반 장애들이 어느 정도까지 장애 운동가들과 반대로 미디어 표현을 해석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장애 문화

 장애문화는 장애인을 결속시키고 이들을 비장애인과 분리시키는 공통의 정체성과 이해관계에 대한 지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정치적 행동의 연대 수준과 형태가 다양하듯이, 집단 결속 및 자각을 위한 엄밀한 기초 역시 다양할 것이다. 장애인의 집단적인 사회적 배제의 원천에 대한 합의가 존재할 때, 장애 자각의 잠재성은 강화된다. “내부자”와 “외부자” 사이의 분리는 분리된 학교나 기숙 학교 혹은 색다른 언어 같은 특별한 문화적 스타일, 관습,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촉진되고 유지된다. 장애문화는 손상-차이 개념을 연대와 긍정적 정체성으로 보는 대신 수치심 혹은 자기 연민과 스트레스로 바라보는 것을 거부한다하는 더 심화된 생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의료화되고 손상에 기초한 자아로부터 장애인 정체성과 자각으로의 전환은 반드시 하나의 방향 혹은 하나의 차원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핵심 이슈는 장애인 공동체가 모든 범위의 손상을 가진 자들에 기초하는가, 아니면 특정한 혹은 제한된 손상의 범위에 제약되는가이다. 이는 보편적 장애문화와 특정 장애 집단이 형성한 장애 하위문화를 구별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당면한 한 가지 걸림돌이 있는데, 그것은 농 하위문화 지지자들이 이 같은 주장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장애 인구 내부의 하위집단이 아니라 독자적인 언어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학습장애인 조직들은 자신들이 다른 장애인들로부터 사실상 무시당해 왔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던 관점은 다층적이고 유연한 정체성을 강조한다. 문화정치 개념은 서로 다른 주체성에 의해 중층화되어 있다. 지배 담론은 차이를 기술적 혹은 핵심적 범주로 간주하는 반면, 포스크모더니스트들은 차이를 사회적 구성으로 본다. 또한,〔지배 담론은〕연대가 “차이”에 의해 지탱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반면,〔포스트모더니스틀은〕다양성을 수용할 뿌만 아니라 삶의 필수요소로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보기에, 장애정치는 장애만 관심을 가지는 단일 이슈 정치에서 집중해서는 안 된다. 실천적으로 보면, 장애정치는 다층적이고 동시다발적인 연령, 계급,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따위에 기초한 억압의 원천에서 벗어난 관심사만을 반영한다. 장애 인구 내부의 차이 개념이 지금은 폭넓게 인정되고 있지만, 이 개념은 정치적 전략에 관한 논쟁적 이슈 한 가지를 남겨두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다양성과 파편화 그리고 광범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를 당면한 현실에 맞도록 축소할 것을 강조하는 반면, 이 보다는 더 “전통적인” 장애 이론가들은 이렇게 하면 정치적 나태함을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장애인들은 통일된 정치 행동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다양성도 강조하는 두 길을 모두 갈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장애문화 전망에 대한 지배 문화의 반응은 다양한 방식으로 적대적이고 부정적이고 온정적이었으며 장애문화의 타당성을 의심해 왔다. 그래서 장애문화는 정치 투쟁을 통해서 그리고 자원이 거의 없는 채로 구축되어 왔다. 아울러 대다수 장애인들은 후천적으로 손상을 가지게 되는데, 따라서 이것은 이들의 장애문화 수용이 비장애인 환경으로의 흡수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장애인 공동체가 미성숙한 것은 주로 장애인들이 자신의 인지된 손상에 때문에 분리된 탓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북아메리카와 영국에서는 최중증 손상자들 혹은 “위험한” 개인들을 위한 특별한 시설에 의존하는 경향이 널리 확산되었다. 초기에는 종교적 색채를 띠던 시설들이 점차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의료 체제로 대체되었다. 교육 기관과 재활기관같은 곳에서 장애인 수용자들이 겪은 공동의 경험은 “방어적”이긴 하지만 공유된 의식 발전의 잠재성을 높였다. 이런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 몇편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어빙 고프먼이 1961년에 시설 수용자의 정신의학적 삶을 묘사한 연구이다. 이 연구는 사회적 일탈에 대한 제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개인과 집단의 전복 가능성과 대안적이고 공유된 저항 문화의 발달 가능성도 입증한다.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흑인 시민권 운동에서 촉발된 사회적 저항의 형태들이 집적되면서 거주시설들은 장애운동을 위한 비옥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미국에서 독립생활이 등장한 것은 베트남전쟁에서 장애인이 된 제대 군인들이 귀환한 것과 함께 더욱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영국의 장애인 투쟁은 햄프셔주에 있는 채셔 재단 시설인 르 코트에 거주하던 한 무리의 장애인들이 행동에 나서면서부터였다. 초창기에는 공동의 이익을 확인하고 정치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 초점이 관심거리였다.

 장애 의식 발전의 분수령은 장애란 개인에게 알맞은 해결책을 요구하는 개인의 문제라는 시각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 따라서 책이나 잡지에서 다른 장애인의 경험을 읽거나 듣는 것과 장애 전문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발행된 <디스어빌리티>, <마우스> 같은 “대안적인” 장애 언론을 비롯하여 장애인 당사자의 경험에 관한 글들이 꾸준하게 늘었다. 상당수 장애인들은 공유된 장애 경험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비록 그런 경험의 원천을 진단하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에는 다소 동의가 부족했지만.
 또한, 정치 운동이 늘어나면서 마침내 이 운동은 미디어가 광범위하게 유포하는 수동성과 의존성 이미지와 대적한다. 정치 운동은 접근할 수 없는 건물과 교통수단, 모금방송 같은 자선 행사, 복지예산 삭감에 대한 저항운동과 폭넓은 시민권 투쟁의 참여자라는 새로운 장애인 상을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는 미디어가 버스와 기차에 쇠사슬을 묶고, 도로를 가로막고, 거리를 기어가는 장애인의 이미지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제 정치 운동은 장애인 당사자들 사이의 시각 차이와 기존의 장애인을 위한 단체와 장애인 당사자들이 통제하는 장애인의 단체 사이의 대비에 초점을 맞추었다. 완전히 새로운 장애 정치의 영역이 그 자체로 미디어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뉴스 보도매체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드러나고 있다. 장애인은 헌신적인 보호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개인의 비극이나 부담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고 용감한 전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사레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확인시켜주는 확실한 조사가 있다. 처음에 신문과 TV는 이처럼 상반된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고 혼란스러워 했다. “마지막 시민권 투쟁”이라고 말하면서도 장애 투쟁이 장애인을 지지하는 사람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다고 위협한다거나 단지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하는 시위자들의 편을 들기 어렵다고 하는 등 뒤죽박죽이었다. 정치적 분위기가 장애인들에게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었음에도 전통적인 편견이 일소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센데이 텔레그라프> 같은 이름 있는 신문조차 다우닝가에서 벌어진 “붉은색 칠” 시위에 참가한 “격분한 콰지모도들”에 대한 비난으로 기사란을 채웠다. 기사를 보면, “그들은 단순히 겉으로만 저항하는 자들이 아니라 아주 무시무시하고 격분한 자들로 보였다.”

 이런 투쟁을 통해 결국 1995년에 장애차별법(DDA)이 제정되었지만, 장애인 운동의 중요한 분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앤 포인튼이 지적하듯이, “언론은 대체로 호의적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충분한 지식이 없는 리더쉽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HIV/AIDS 감염인들을 “장애인” 범주에 포함시키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역사적 유적을 파손해야 하는데 따른 비용과 충격에 대한 두려움이 장애차별법을 장애인들의 관심사를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만든다. 장애 전문 라디오 및 TV 프그램들이 이 같은 주제에 더 많이 관심을 기우리도록 했지만, 대중들 특히 비장애인들에게까지 전달되지는 못했다. 요약하자면, 더 폭넓은 장애인 청중들이 자신의 처지와 경험을 공공연하게 재평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지배적인 미디어 이미지들을 전복시키지 않고서도 정치적 행동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정체성 정치

 지난 10년 동안, 대서양 양안의 사회 이론가들은 몸에 관한 이론과 몸이 정체성 투쟁을 위한 핵심 장소가 된 방식에 몰두하게 되었다. 스스로 개선하는 건강한 “몸 프로젝트”에 주목하는 것은 오늘날 소비자주의 문화의 핵심 주제로 간주된다. 이것은 “흠 있는” 몸 그리고 “부정의 쓰레기통”과 관련된 장애인들에 대한 현존하는 표현의 중요함을 더욱 강조하였으며 심지어는 더 심하게 표현하도록 했다. 비장애인들이 통제권을 잃어버리고 무력감에 빠져들 것이라는 우려가 예술과 미디어에 나타난 이미지에 투영되었다.

 반대로, 정체성 정치는 억압받거나 주변화된 집단에 포함된다는 소속감, 그리고 그 소속감의 미덕에 대한 찬양에 기초한다. 파인과 애쉬가 조사한 증거 자료를 보면, 미국 장애인의 74%는 공통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 같은 “공통성”은 사회적 장애모형에 집착하기 때문만이 아니며, 또 이런 공통성이 반드시 정치 운동을 이끄는 것도 아니다. 장애인 정체성으로의 이행은 극적으로 “회개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라기 보다 더디고 불명확할 때도 더러 있다. 더욱이 이같은 정체성 만들기의 특성과 범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재구조화에 열려 있다. 장애는 정체성 혹은 차이의 또 다른 주요 원천들 안에서 상호작용하기에, 이런 불확실성은 복합적이다. 따라서, 이를테면 늙은 흑인 장애 남성과 대비되는 젊은 백인 장애 여성을 어떻게 범주화할 것인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독자적 문화 정체성의 등장은 장애인들을 갈라놓았다. 농인들처럼 오랫동안 구분되는 문화를 가졌다고 스스로 간주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대다수 장애인들은 이런 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사이미 린튼이 지적하듯이, 장애인은 여전히 개인적 편차가 심한 편이지만 하나의 집단으로 “결속되어 있다.”
 “역사에서 감추어져 왔던” 혹은 사회적 계급, “백인성”, 이성애 같은 “지배자” 정체성에 의해 뒷전에 밀려나 있었던 여러〔소수자〕정체성들이 이처럼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운동의 아주 중요한 특성이다. 배제와 주변화의 원천이 되던 것이 자부심의 원천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같은〔게이들의〕말을 손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대체로 볼 때 논란이 심하다. 장애인들이 “손상을 입은 것이 기뻐”라는 말을 고통의 주제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도 멀었고, 손상을 입은 사람들이 “방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외침에도 장애인들이 꿈쩍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합 정체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특정 장애인을 다른 장애인과 구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사람들은 “장애인 다이크들(disabled dykes)”이 “레즈비언 문화 생산의 모든 영역”에서 배제되는 방식을 통해 이것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장애인 다이크들은 제도적, 상징-담론적, 그리고 사회적 분야에서 동성애 투쟁과 거의 연대하지 않는 장애권 운동을 지배하는 백인 중심의 이성애주의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의식 제고”에 대한 열망은 장애인들의 공통의 사회적 억압 경험으로 간주되는 것에 기반하였다. 이것은 보편적 장애 문화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백인, 중산층, 남성의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이유로 점차 비판받고 있다. 장애 인구 내부의 사회적 분화를 인정하면서, 장애 문화에 대한 가정된 동질성은 정체성을 확보하거나 손상 유형에 따른 구분된 응집력이 강한 하부 집단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최근에는 사회적 정체성과 이 정체성의 끊임없는 재창조와 재현의 유동성 - 실천과 담론을 아우르고 “복합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유동성 - 이 사회이론을 선점하고 있다. 이는 장애인 정체성의 경계의 이동과 “장애인” 범주의 해체를 강조한다.

 이 같은 해체론적 접근법에서 간혹 간과되는 이슈가 있는데, 그것은 이리스 영이 주장하듯이 “부수적인 정체성들”이 그 자체로 사회 정책과 사회 저항에 구체화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해체론은 공동체 내부와 공동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대립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장애 예술

 장애예술운동의 등장은 사회적 장애모형의 토대 위에 건설된 긍정적인 장애인 묘사로의 전환이라는 의미 있는 단계로 진입하였다는 뜻이다. 이 운동은 문화적 재현과 미디어를 통한 재현에 초점을 맞추며, 폭넓은 정치 운동에 의지하고 또 그 운동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더욱 심화된 장애인의 자기-정체성 찾기이다.

 장애예술운동은 몇몇 차원을 강화시킨다. 첫째, 이 운동은 장애인들이 예술 소비 및 생산의 주류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이 운동은 손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탐구하는, 즉 손상에 초점을 맞춘 예술을 아우른다. 가장 중요한 셋째, 장애 예술은 사회적 배제와 주변화 경험에 대한 결정적 반응을 제공한다. 여기에는 공유된 문화적 의미의 발전과 장애 경험과 투쟁에 대한 집단적 표현이 포함된다. 장애 예술은 장애인이 직면한 차별과 편견을 폭로하고 긍정적인 집단 의식과 정체성을 생성시키기 위해 문화와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장애 예술”과 “예술에 종사하는 장애인들”을 결정적으로 구분짓는다. 장애인들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창조하고, 글로 쓸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명백하게 “정치적”일 필요는 없다.

 장애 예술은 어쩌면 교육적이고, 변혁적이고, 감성적이고, 그리고 참여적이다. 장애 예술은 독일의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극작가와 브라질의 파올로 프레이리 같은 교육학자 덕분에 만들어진 문화 행동 개념이다. 이 두 사람은 장애 예술이 개인적 수준과 사회적 수준에서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세력이 될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브레히트는 억압과 불의에 초점을 맞춘 연곡과 노래를 만들었으며, 프레이리는 교육을 사람들의 정치 의식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보았다. 이 같은 설명은 전복적인 재현 혹은 연기를 통해 차별적인 장벽과 태도를 묘사하고 또 이에 대적하는 이른바 “의미의 정치”를 찬양하는 페미니즘 분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와는 반대로, 장애인에 대한 전통적 접근법과 예술은 온정주의에 기초한다. 여기서 장애인은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없거나, 부정적인 사고로 가득 차 있거나, 정상적인 대화로는 다른 사람과 생각과 느낌을 주고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비춰지기에, 예술은 치료의 수단으로 혹은 “재활” 과정의 일부로만 제공된다. 이런 것은 특히 특수학교, 주간보호센터, 분리된 시설들이 강제하는 행위들이 가진 특징이다. 이 같은 조치들은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탈정치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이 뿐만 아니라 각종 재단이 만들어서 판매하는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보듯이 상업적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착취하기도 한다. 예술 치료를 하는 장소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장애인들은 자신의 손상에 대한 심리적 적응 상태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는 운동적 지향을 점점 더 발전시키고 있다. 예술 치료는 장애인은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가정에 기초하는 것이 대부분이다.〔하지만〕장애 예술은 정반대로 주장한다. 장애 예술은 등장한 이래 줄곧 장애인의 정치화에 확실하게 기여하고 있다.

 사이드쇼에 출연하는 것에서 벗어나 “현실의” 정치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장애 예술과 문화는 장애인의 이익을 진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장애인 당사자 시인, 음악가, 예술가, 엔터테이너가 만든 작품들이 상당히 늘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장애인의” 라이프스타일에서 얻는 경험과 가치를 주장하는 것들이다. 이 같은 발전은 장애인들 사이에서 자신감이 쌓인다는 뜻한다. 장애인들은 주류 예술 교육으로부터 폭넓게 배제되었거나 힘을 쓰지 못했기에, 그 상처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 운동이 장애인 당사자 예술가들을 지지하고 육성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장애 예술에 상당수 장애인들이 참여한다는 것은 장애인 운동이 성숙했다는 지표이다.

 영국의 초창기 시도로는 1975년에 처음으로 장애인을 위한 TV 프로그램 <Link>가 제작된 것과 장애인 당사자들과 단체들이 생산한 일련의 뉴스레터와 잡지들을 들 수 있다. 1981부터 1987년까지 발행된 <In From the Cold> 역시 영국장애인해방네트워크가 생산한 잡지이다. 맨체스터장애인연맹이 만든 잡지 <Colition>은 1986년에 첫 발간되었는데, 여전히 잘 나온다. 게다가 런던장애예술이라는 잡지는 1987년에 첫 발간되었는데, 전국 발행부수가 3,000부이고 독자는 약8,000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잡지들에는 장애 이슈ㆍ문화ㆍ예술에 대한 기사, 특집, 비평, 논평이 들어 있다. 이 밖에도 1986년 런던장애예술포럼 설립, 1987년 맨체스터장애예술회의 설립, 그리고 영국 곳곳에서 회의, 전시, 워크숍, 오락, 공연 따위를 할 때 장애 예술이 급증한 것들이 장애 예술이 집적된 사례들이다. 실제로, 소수자를 위한 프로그램 만들기로의 전반적인 전환과 보조를 맞추어 1980년대 후반에 <Same Difference> <See Hear> <One in Four> 같은 또 다른 “전문가” 장애 프로그램이 영국 TV에 나타났다. 1993년 BBC는 장애 프로그램부를 설치하였는데, 스탭들은 주로 장애인 당사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Link>에서 미디어 프리젠데이션 기술을 배운 장애인들이었다. 이런 것들이 장애인 권리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전투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이 “장애인” 정체성을 받아들이도록 자극하였다.

 이 같은 흐름이 북미에서는 1980년에 발간된 미국 독립생활운동의 비공식적 신문 <The Disability Rag> 같은 장애 언론의 성행으로 이어졌다. 프랭크 보위는 1960~70년대 미국에서 장애 인식이 태동에 관한 초장기 견해를 제시한다.〔당시에는〕장애와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는 개인적이고 지적인 탐색하는 어빙 졸라의 이야기처럼 아주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손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상과 개인적 조정에 초점을 맞춘 자전적 이야기가 성행했다. 이런 저술은 집잔 정체성과 이익에 대한 의식을 전달하는 소설, 코미디, 노래, 시, 연극, 그림, 조각의 집중 생산에 의해 보완되었다. 미국 비평가들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장애 문화가 장애권 투쟁의 보완물로 번성하였다고 결론 내린다. 장애 문화는 집단 의식을 튼튼하게 하는데 일조한 결과, 1990년대 초반부터는 “장애문화운동”이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장애인이 주류 문화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도 사라졌다. 가령, 미국에서는 농인들이 청력 손상을 입은 시청자들을 위한 “클리즈 캡션” 시스템을 수신할 수 있도록 ADA가 TV 제작사들의 디코드 칩 장착을 강제하였다. 영국의 경우, 내셔널 로터리 기금이 1백만 파운드가 들어가는 국립수화비디오센터 설립의 첫 단계로 유럽수화 비디오 도서관 설립 지원을 위해 왕립농학교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발전에도 불구하고 “장애 문화”, “장애 자부심”, “차이의 찬양” 같은 개념은 많은 장애인들에게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자신의 손상이 고통스럽고 악화되고 있거나 조기 사망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다른 피억압 집단들은 “흑인은 아름답다”고 주장하거나 “게이인 것이 좋다”라고 스스로 선언할지라도, 장애인들이 자신의 손상을 그렇게 찬양하는 것은 어렵다. 장애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장애를 조장하는 수많은 장벽들의 중요한 사회정치적 기원들에 관해 합의할지라도, 많은 장애인들은 “우리는 우리의 신체적, 지적 차이를 찬양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장애인들은 손상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인지된 손상을 가진 사람들도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손상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한 것 같다.

 장애 예술의 잠재력은 권한 강화로 가는 길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모리슨과 핀켈스타인이 주장하듯이, 장애인운동뿐만 아니라 장애 예술도 장애인들의 다양한 경험을 비판적으로 반영하는 공간이 된다. 하지만 장애 문화와 예술이 그것을 수용하는 장애인들과 교감이 없다면, 그것의 영향력은 그 자체로 배제적인 것이 된다. 또한, 장애 예술과 문화가 그 정치적 의미가 중립화됨으로써 주류 문화에 동화될 수 있다는 걱정이 늘 존재한다. 그러나 장애 예술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제에 도전하는데 잠재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출처: (사)한국장애인인권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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